글리픽은 종이에 쓰인 것보다는 돌에 새긴 글자 형태를 모방하는 서체 양식입니다. 따라서 이 분류에 속하는 가장 전형적 서체들은 대문자로만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양식의 특징은 획의 마무리 부분에서 보이는 뭉툭하거나 뾰족한 모양에 있는데, 이는 글자를 돌에 새길 때 사용하는 도구나 기술의 영향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글리픽 스타일의 서체로는 트래이전, 앨버터스 같이 제목용으로 사용하기 좋은 서체부터, 퍼피추아 같이 본문용 서체로 사용 가능한 것까지 다양합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미국의 디자인 명문 학교 로드 아일랜드 스쿨 오브 디자인의 그래픽 디자인 학과에는 돌에 조각하는 글자라는 선택 과목이 있었습니다. 장인과 같은 선생님의 지도 아래 적절한 재질의 돌을 감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 한 학기 결과물이라야 각자 좋아하는 문구를 손으로 새긴 돌 두 개를 건지는 것인데, 타이포그래피를 진지하게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꽤 인기 있는 과목으로 알려져있었습니다. 로만 알파벳의 원형을 로마의 유적 트라야누스 황제의 기념비에서 찾듯이 돌에 새긴 글자의 역사는 캘리그래피의 역사와 함께 서구 타이포그래피의 근원이 됩니다. 에릭 길이 디자인한 퍼피추아는 돌에 새겨진 글자의 특성을 잘 보여 주는 서체입니다. 활자의 발명 이래 수백 년에 걸쳐 자리 잡은 알파벳 각 글자의 특징적 세리프의 모양은 끌로 정교하게 깎아낸 듯 끝이 뾰족한 형태로 대치되어 또렷하고 예리한 인상을 줍니다. 소문자 b와 d 등은 간결한 형태를 이루고 있어 이 고전적 서체로부터 현대적인 감성이 풍겨납니다. 동시대 영국에서 활동한 타이포그래피 학자 비트리스 워드는 퍼피추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에릭 길의 새로운 세리프 서체는, 펜으로 그렸을 때도, 절대 서투르지 않고, 또 자의식적이지도 않다. 돌에 새긴 글자, 빛과 그림자의 구조가 그로 하여금 획이 정확히 얼마나 길어야 하는지, 또 어떻게 끝나야하는지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에릭 길은 서체 디자이너이기에 앞서 천부적인 조각가였습니다. 그는 30대에 이미 런던 웨스트 민스터 성당의 성상을 조각했습니다. 명각 글씨는 조각 작업에 따르는 부분이었고, 그의 아름다운 글씨는 전문가들 사이에 알려져 있었습니다. 모노타입사의 서체 고문 스탠리 모리슨은 벰보 등과 같은 고전적 서체들을 당시의 기술로 되살리는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었지만, 이를 넘어서 당대의 독창적 세리프 서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형태의 가능성을 명각 글씨로부터 찾았고, 에릭 길에게 이를 의뢰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전문 분야가 아니라며 고사하던 에릭 길도 결국 그 뜻을 수락하고 자신의 전문성을 드러내는 세리프 서체를 디자인했습니다. 이것은 가톨릭 성자 두 명의 삶을 다룬 퍼피추아와 펠리시티의 수난기 라는 책을 출판하기 위해 처음 사용됐습니다. 에릭 길과 스탠리 모리슨의 만남은 20세기의 매우 중요한 서체 두 가지를 탄생시켰는데, 그 하나가 길 산스고 다른 하나가 퍼피추아 입니다. 조각가 에릭 길의 서체들은 2002년 흥미로운 공공 디자인 프로젝트에 등장했습니다. 영국 랭커셔 해안의 리조트 모어컴비 베이는 새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천국인 철새의 도래지 입니다. 영국의 진보적 디자인 스튜디오 와이낫 어소시에이츠가 조각가들과 공동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새로운 기차역부터 해안까지 약 300미터의 거리를 새에 관한 시나 속담 등을 이용해 디자인한 것입니다. 새를 연상시키는 단어의 무리 라는 이름의 이 프로젝트 에서 단어들은 철, 화강암, 콘크리트, 동 등 다양한 재료 위에 조각하거나 구현했는데, 사용한 서체는 모두 조각가 에릭 길이 디자인한 서체였습니다. 퍼피추아의 명각 글씨는 영국의 유명 디자인 스튜디오인 펜타그램의 파트너 존 맥코넬이 디자인한 나폴리 재단 포스터의 주된 이미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나폴리 지역의 문화유산 훼손에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용된 퍼피추아 서체는 위태로운 로마 유적 자체를 상징하는 메타포가 되었습니다. 캐나다 디자이너 브루스 마우는 존 북스라는 미국의 출판사에서 작업한 디자인이 알려지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일련의 북 재킷 디자인에서 그는 사진 이미지와 서체의 품격 있는 결합으로 시적 커뮤니케이션을 이끌어 냈는데, 여기에서 퍼피추아 서체는 정적이면서도 강인한 목소리로 사진 이미지가 가진 표현력을 증폭시키는 듯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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